1. 지난달 6일, 통화정책회의를 마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국채시장의 불안은 통화정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부정책의 공백을 통화정책이 대신 메꾸는 것은 옳지 않다. (정부정책과는) 어떠한 흥정(horse trading)도 없다"고 강조했다.
→ 시장에 개입해 국채를 직접 사들이는 것은 정부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이 것은 ECB에게는 "금기(taboo)"이며, 이 문제에 관한한 정부와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2. 그러나 지난 22일, 프랑스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드라기 총재는 "유로존이 와해될 것이라는 애널리스트들의 시나리오는 유로존에 투자된 각국들의 정치적 자본을 도외시한 것"이라며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고 말했다.
→ 경제적 논리로는 그런 시나리오를 쓸 수는 있겠으나, 경제논리를 초월하는 게 정치논리이며, 유로존의 정치논리는 어떻게든 유로를 살리겠다는데 있다는 설명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드라기 총재는 "우리는 아주 오픈돼 있다. 어떠한 금기(taboo)도 없다"고 말했다.
3. 이어 지난 26일, 런던올림픽을 기념해 열린 컨퍼런스에서 드라기 총재는 다시 한 번 "유럽의 정치적 자본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ECB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벼랑끝의 유로화를 지키기 위해 이제 ECB는 "정치적" 논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여기에는 어떠한 금기도 없을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가 "통화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했던 스페인 국채시장 불안에 대해 한 달여만에 "개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이런 중대한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통화정책의 파급경로 복원"이라는 명분을 갖다 붙인 것은 최소한의 포장일 뿐이다.
4. 27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전화 접촉을 가진 뒤 배포한 공동 성명서에서 "양국 정부는 유로존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할 용의가 있다"면서 "유로존의 회원국들과 유럽의 기구들(주로 ECB를 의미) 역시 자신들의 권한 범위 안에서 책무를 다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ECB의 천명에 정부도 적극 부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스페인 국채시장 개입에 정부(EFSF)도 동참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5. 이에 앞서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도 성명을 발표, 드라기 총재의 천명을 환영하면서 "ECB의 대응에 앞서 정부들도 금융과 신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조치를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취한 재정 안정화 노력을 치하(?)했다. 이제 남은 것은 ECB에 보조를 맞춰 EFSF가 국채시장에 개입하는 것이다.
6. 실제로 드라기 총재는 EFSF의 발행시장 개입에 맞춰 유통시장에 ECB의 자금을 투입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한달여 전에 부인했던 "흥정(horse trading)" 즉, 정부의 정책에 호응한 중앙은행의 보조 정책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주고받기(quid pro quo)"는 그동안 ECB의 금기로 여겨져 왔다.
EFSF가 먼저 나서는 걸 전제로 하든, ECB의 개입에 EFSF가 보조를 맞추는 것이든, 형님과 아우 누가 먼저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EFSF의 개입을 전제로 한다면, ECB는 정부를 보조하는 금기행위를 하는 것이며, 반대로 EFSF가 ECB를 측면지원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통화정책의 파급경로 복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7. 드라기 총재는 한 발 더 나아가, 추가적인 금리인하와 LTRO3 가동도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른바 "다각적인 개입(multi-pronged approach)" 조치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드라기 총재는 마지막 금기, 즉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를 극복하기 위해 옌스 바이드만 총재를 조만간 만날 예정이다. 27일 분데스방크는 전날 드라기 총재의 "천명"과 관련한 성명에서 "(ECB의 국채매입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바이드만 총재의 전임자였던 악셀 베버 총재도 ECB의 국채매입에 반발해 사표를 던진 바 있다.
8. 유로존에서는 두 발 더 나아가, 그리스에 대한 ECB의 채권도 탕감해 주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그리스 역시도 다 품고 가겠다는 의사다. "유로존을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과 드라기 총리의 발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채무 탕감에는 ECB 뿐 아니라 각국 중앙은행들도 참여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 중에는 프랑스 중앙은행이 상당한 부담을 져야 할 것으로 전해졌다. ECB 및 중앙은행들이 탕감해 줄 규모는 최소한 700억 유로(30% 헤어컷 적용)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스에 대한 채무탕감에는 각국 정부들도 참여할 수 있겠으나, 이에 대해 EU 관계자는 "ECB 및 중앙은행들만 탕감에 참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추진하기에 용이하다"면서 "성사될 확률이 현재 70% 정도 된다"고 말했다.
중앙은행의 국가채무 탕감지원은 "정부부채 화폐화(debt monetizing)"의 전형이다. 그리고 이 것은 ECB의 최대 금기(taboo)사항이다. 그리고 이 금기는 드라기 총재가 역설한 "정치적 자본(political capital)"의 힘으로 깨질 조짐이다.
유럽 통화동맹이 이제서야 부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상적인(?) 경로로 진입할 조짐이다. 경제논리로는 더 이상 극복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9. 여기에는 범세계적인 "정치적 자본"이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오는 30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 및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와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10. 결론적으로, ECB의 정치화는 유로존 채무위기의 국면이 일대 전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ECB의 후행성과 점진주의가 대폭 철회될 가능성을 반영해 유로존의 위험에 대한 시각을 일단 한 단계 하향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기적으로 많은 잡음들이 수반될 것으로 보이나, 유로존의 위험 수위는 추가적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판단한다.